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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부랭이/게임 관련

[DOS] 로그: RPG의 시작

 게임을 좀 했다 하는 사람이라면, 로그(rogue)라는 단어가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여기저기 유명한 게임에서도 많이 등장했고, 심지어는 영화나 소설의 제목으로도 쓰였으니까요. 하지만 '로그'라는 제목의 게임을 알고 있느냐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많을지 모릅니다. 하긴 벌써 30년이나 된 게임이니 그럴 법도 하지요.

 1980년의 컴퓨터라는 물건은, 그 크기나 가격을 생각할 때 도저히 가정집에 들여놓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계산력을 필요로 하는 몇몇 연구소에서나 도입했던 첨단 기기였지요. 이러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우선 컴퓨터의 조작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고, 로그는 바로 이런 목적에서 컴퓨터에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던 게임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복잡한 입력장치였던 키보드(수십 개의 키가 깔려 있으니, 복잡하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요)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자판의 위치를 익히기 위한 소프트웨어였던 것이지요.

한글타자연습

그러니까 이런 개념의 프로그램이었던 것이지요.

 지금에야 32bit 컬러에, 초당 수천만 폴리곤에, 각종 효과들을 집어넣어 뽀사시하게 보이는 게임화면이지만, 당시의 컴퓨터는 단순한 선도 그릴 수 없는 물건이었기에(그야 계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로그의 그래픽은 모두 '아스키 문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플레이어는 '@', 몬스터는 알파벳, 던전의 구조는 '|'와 '-', '#'으로 나타내는 식이었지요. 몬스터와의 전투 상황이나 주인공에게 발생하는 각종 상황 역시 화면 위에 문장으로 표시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래픽과는 달리, 그 게임성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로그

로그의 화면. 컴파일사의 홈페이지에서 훔쳐왔습니다.


 춘소프트의 이상한 던전 시리즈는 그 랜덤성으로 유명한 시리즈입니다. 플레이할 때마다 재생성되는 던전, 죽으면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압박, 한 턴 한 턴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긴장감... 하지만 이상한 던전 시리즈가 가진 시스템의 대부분은 이미 로그에서 구현되었던 것입니다. 던전은 항상 랜덤하게 생성되고, 아이템은 모두 미식별된 상태로 등장하며 죽으면 그것으로 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지요. 이러한 게임성은 당시 이 게임을 즐겼던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이런 시스템을 도입한 게임들, 소위 말하는 '로그 라이크 게임'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상한 던전 시리즈는 이 '로그 라이크 게임' 중에서도 굉장히 성공한 케이스인 것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번에 이야기할 게임은 이 로그의 도스 버전입니다. 1984년 '퍼블릭 도메인 소프트웨어'사에 의해 개발되었고 시간이 흐른 만큼 그래픽 면에서 약간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원작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게임이지요.

로그(DOS)

이 정도의 업그레이드입니다.


 게임의 목적은 꽤나 단순합니다. 주인공은 전사 길드의 훈련을 모두 마치고 최후의 시련에 도전하게 됩니다. 그 시련이란 것은 '운명의 동굴'에 있는 '옌더의 아뮬렛'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성공하게 되면 주인공은 정식 길드원으로 인정받게 되고 덤으로 던전에서 얻게 되는 아이템의 소유권도 얻게 됩니다. '운명의 동굴'은 다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아뮬렛은 지하 26층 아래에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 동굴에 홀로 들어가 던전을 탐색하고, 돈과 아이템을 모으고, 몬스터와 싸워 레벨을 올리고, 아뮬렛을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은 클리어보다는 '좀더 깊숙히' 들어가 '좀 더 많은' 점수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미 적었다시피, 던전의 구조는 매번 변화합니다. 플레이어와 몬스터는 턴에 따라 움직이며 플레이어가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히 몬스터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이템은 사용하기 전에는 절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고 심지어는 주인공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아이템도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제대로 싸울 수 없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만약 던전 안에서 사망한다면 모험은 그대로 끝나고, 다음 번에 플레이할 때에는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중간에 게임을 저장할 수는 있지만 저장을 하면 게임이 종료되고, 세이브 파일을 불러오면 바로 삭제되어 버립니다. 물론 파일 관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세이브 파일을 백업해 둘 수는 있겠지만, 재미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그(DOS)

심지어는 직접 이름을 적어 식별해야 하는 아이템도 있습니다.


 몬스터는 알파벳으로 표시되며, A부터 Z까지 26종이 있습니다. 각각의 알파벳은 각 몬스터의 이니셜이지요. 가령 B는 Bat, S는 Snake라는 식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각각의 몬스터는 행동 패턴이나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좀 더 손쉬운 탐색이 가능합니다. 사실 전투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그 이유가 명중률 때문이라는 것은 좀 억울한 일이긴 합니다만) 몬스터의 행동 패턴을 파악해 전투를 회피하는 테크닉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플레이어 스스로 모험을 포기하거나 던전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무사히 아뮬렛을 가지고 귀환하게 되면 순위가 매겨지게 됩니다. 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레벨이나 던전의 진입 층수, 아이템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오직 돈만 가지고 계산을 하게 되지만, 아뮬렛을 가지고 귀환했을 경우에는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모두 팔아 소지금에 보태게 됩니다. 던전에서 사망했을 경우 그 시체와 유품을 유족에게 전해 주기 위한 일꾼들의 고용비로 소지금의 10%가 공제되는 등, 의외로 세세한 부분까지 설정이 붙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입니다.

순위표.

순위표. 소지금과 종료 사유, 던전의 층수가 기록됩니다.

 이상한 던전 시리즈 등을 즐겨오신 분이라면, 글 초반부터 한 가지 의문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 게임을 통해 자판에 익숙해 지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상한 던전 시리즈는 콘솔 게임기로 발매된 만큼 그 조작 체계가 무척 직관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로그'는 각 행동마다 키가 따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가령 음식을 먹기(eat) 위해서는 e, 포션을 마시려면(quaff) q, 스크롤을 읽고(read) 싶다면 r을 눌러야 합니다.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분도 있어 w는 무기의 장비(weild)이고 W는 갑옷의 장비(Wear)가 되는 식이지요. 이런 식으로 각 커맨드가 자판 전체에 흩어져 있는데다, 아이템을 사용하는 커맨드는 알파벳을 사용해 아이템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몇 번 놀다 보면 어느 글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금방 익숙해지겠지요.

도움말

커맨드의 도움말. 저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실 1984년의 게임을 이제와서 즐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눈높이에 저런 그래픽 같지도 않은 그래픽이 들어올 리 없겠지요. 아무리 '게임은 그래픽이 전부가 아니야'라고 외쳐도 어느 정도이지, 저렇게 그림인지 문자인지 애매한 수준이 되면 플레이하는 것 자체가 고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던전 시리즈를 비롯한 '로그 라이크 게임'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 원작을 한 번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번외편. 대세는 리메이크.

 사실 춘소프트의 이상한 던전 시리즈가 로그의 가장 이상적인 리메이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에 맞서 원작 로그를 그대로 리메이크한 작품이 있습니다. 2007년 4월 컴파일사가 발매한 PS2용 '로그 하츠 던전'이 그 작품이지요. 사실 발매 전에는 꽤 기대하고 있던 작품입니다만, 발매 후 일본쪽 웹사이트에서 리뷰를 보니 '이 게임을 돈 받고 팔겠다는 생각을 한 제작진과, 이 게임을 정가를 주고 산 구매자 모두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평이 있더군요(...). 제 꼬드김에 먕군 형님도 같이 시작했습니다만, 결국 먕군 형님은 엔딩을 보기 전에 포기(이건 결국 이 게임에 건질 만한 요소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저 역시 아예 플스2를 들어내고 다시 N64를 설치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먕군 형님이 분노를 담아 작성한 포스트가 있으니 그 쪽을 참조. 개인적으로는 플스3와 XB360이 설치는 시대에 슈퍼패미컴 수준의 그래픽으로 게임을 만들어 팔려고 한 제작진의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가난해 보이는 게임은 처음인 것 같군요.

로그 하츠 던전

훌륭하게 만들어진 게임들 많은데, 굳이 이걸 할 이유는 없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한 리메이크도 있습니다. 바로 아스키가 제작한 winrogue(1997년). 도무지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스크린샷을 올리진 못했지만, 무려 3D라고 합니다. 다만 대각선 이동이 사라지고 아이템의 종류도 줄어드는 등 원작에 비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군요. 결정적인 것은 몬스터의 표현으로, 모두 3D로 그려진 알파벳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