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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부랭이/게임 말고

[소설] 천룡팔부


 모처럼 동네 책방에 갔다가 문득 무협소설 코너를 봤습니다. 사실 학생 시절에 무협지 한 번 안 읽어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6년을 거의 무협지와 게임만으로 살았으니까요. 대강 훓어보다가 발견한 천룡팔부. 유명한 김용 님의 소설이지요.

 개인적으로 김용의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신조협려이고, 그 다음은 소오강호, 세 번째가 이 천룡팔부입니다만, 확실히 작가의 다른 소설과는 살짝 어긋나는 재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일단 주인공이 3명이라는 점부터도 그렇고, 또 그 주인공들의 성격 역시 다른 작품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요. 이 소설의 재미는 이러한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의 얽히고설키는 인간관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인 소봉은 얼핏 보기엔 여타 무협소설의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빼어나게 잘난 얼굴은 아니지만, 호탕한 성격과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개방(무협소설에서는 항상 나오더군요)의 방주이지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족이 아닌 거란족이며 이 사실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의 원한 관계를 맺게 되고 끝내는 송나라도 요나라도 택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결말을 맞게 되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자기자신도 죽인 후,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죽게 한 그 결말은 확실히 김용의 다른 주인공(대부분 해피엔딩)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얼굴을 드러내는 단예는 대리국의 왕세자입니다. 그는 매우 잘난 얼굴을 지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이게 되지요. 게다가 초반에 기연을 통해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역시 평범한 무협지의 주인공이지만, 결정적으로 이 녀석은 성격이 좀 답답합니다. 내공은 무턱대고 깊은데 무공을 배우기 싫어해서 제대로 싸우는 장면도 별로 없고 게다가 중반에서 왕어언과 만난 이후의 행동들은 그야말로 찌질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녀석입니다. 제일 싫은 건 역시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여자마다 이복 누이'라는 불행의 극을 달리는 설정에서 '알고 보니 그 여자들은 죄다 6촌 누이라 맘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게다가 그 여자들이 죄다 자신에게 빠져 있는)' 염장 설정으로 변하는 부분이지요. 뭐 제가 솔로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게다가 엔딩에서는 직책이 무려 황제.

 중반부를 넘어서야 등장하는 허죽은 무려 승려입니다. 중은 중인데, 술도 마시고 사람도 죽이고 여자도 품고, 하여간 할 것 다 하고 결국은 소림사에서 쫓겨나게 되지요. 게다가 아버지도 스님이라는 무시무시한 설정(...). 원래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고 어마무지한 내공을 몸에 담게 됩니다. 소림사에서 쫓겨나서도 자신을 승려로 지칭하면서도 술 퍼마시고 결혼도 하고(게다가 마누라는 서하국 공주) 결정적으로 할렘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간도 조금 엄청나지요. 다만, 무협지의 주인공으로서는 덜떨어진 얼굴이 흠이랄까요.

 뭐 주인공의 설정부터가 이런데다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하는 인간관계는 끝이 없습니다. 단예(와 그 아버지)의 여성편력은 둘째치고, 허죽의 어머니인 섭이랑은 단예의 제자(사실은 사기당함)인 남해악신과 한 패라거나, 소봉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닌 원수는 그가 친구로 삼고 싶어하던 모용복의 아버지였다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러가지 비밀(?)들이 차례차례 불거져 나옵니다. 여기에 개방의 인물들이나 성숙파, 소요파의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인물들이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고루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후반으로 가면서는 조금 어지러운 느낌도 들지만 이야기 자체는 세 주인공을 갈아치워가며 대체로 깔끔하게 진행되는 편입니다. 역시 이런 부분이 작가의 내공일까요.

 덤으로 김용의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부분이지만 실제 역사 속의 인물들까지 이야기에 써먹는다거나, 불교나 유교의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은근슬쩍 끼워넣는 것은 확실히 대단하지요. 해당 부분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게다가 이런 요소들이 이야기를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정말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용의 소설이라고 하면 김학(金學)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상당히 수준이 있는 작품들입니다만, 이런 작품을 제 졸렬한 필력으로 적어내자니 크게 무리가 따르는군요. 사실 어느 것이나 그렇습니다만, 역시 직접 접해 보는 게 제일 낫겠지요. 마침 올해 초에 새로 출판되었다고 하니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이 참에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새로 출간된 것도 옮긴이가 박영창 님인 것을 보니 예전에 나온 것을 그대로 다시 낸 듯 하네요.

천룡팔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용 (중원문화,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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